미영이(미국 영어)오빠 블로그
사람은 자신에게 유리하거나 이익이 되면 귀신같이 빨리 갖다 붙이는 나쁜 버릇이 있는데 저 역시 미국에서 살면서 불리한 상황이 닥치면 변명처럼 '나는 외국인이니깐 그럴 수 있어'며 스스로 이방인 모드 자세로 방어와 면죄부를 줄때가 있습니다.
"미국은 이민자의 나라이기에 어느 시점에서 (어느 시점을 거슬러 올라가면) 미국인 모두는 외국인이다."
영어에 대한 다양한 고민을 하다 느슨해질때 제게 미국인 누군가가 제게 한말입니다.
이 말은 단순하지만 꽤 오랫동안 영감을 주었습니다.
미국정계의 새로운 바람을 몰고 왔으며 미국 개척자 정신을 일구었기에 지금까지도 혁신의 아이콘으로 불리우고 있는 존 F. 케네디 역시 멜핑팟 이자 이민자 가족 출신입니다.
존 F.케네디를 말하기 위해서는 그의 가문을 알아야 하겠지요?
오늘은 '존 F. 케네디의 가문'에 대해 알아보려고 합니다.
1. 존 F. 케네디:
미국 역사상 최고의 빛나는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 미국의 개척자적 정신을 일깨우며 혁신의 아이콘이며 미국인의 절대적인 사랑을 받는 미국의 35대 대통령입니다.
존 F. 케네디는 미국 최연소 당선자로 당선될 당시 43살이었습니다.
케네디가 주문받는 이유는 자신의 가문 때문입니다.
그의 가문은 미국 정계의 핵심적 위치인 대통령, 장관, 상.하원 의원 등을 꾸준히 배출해 존 F. 케네디의 든든한 배경이 되었습니다.
2. 패트릭 케네디 (존 F.케네디의 증조할아버지):
케네기가의 역사는 증조 할아버지 패트릭 케네디로 거슬로 올라가며 그는 아일랜드입니다.
대부분 아일랜드인이 미국으로 이민온 이유는 비슷합니다.
1845년 감자가 거의 주식이던 아일랜드에 긴 가뭄으로 인해 감자잎 마름병이 생겨 감자가 썩어 들어가는 대기근이 발생했습니다.
이것은 1850년까지 계속되었는데 당시 아일랜드 인구의 20% 즉, 100만명이 사망한 슬픈 역사가 있습니다. 이로 인해 200만 명의 아일랜드인이 기회의 땅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그 속에는 존 F. 케네디의 증조 할아버지 '패트릭 케네디'(26살)도 있었습니다.
아일랜드인들은 대부분 천주교인데 문제는 미국은 청교도(개신교)의 나라였습니다.
미국에 도착한 패트릭 케네디은 뿌리 깊은 차별과 멸시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 당시 메사추세츠주의 '보스턴'은 개신교의 성지였습니다.
아일랜드인은 그곳에서 정말 심한 차별이 있었는데
오죽하면 이 당시 도시에서 이런 표어를 자주 볼 수 있었습니다.
'NINA(니나)' - NO IRISH, NEED APPLY (아일랜드인은 지원하지 마시오), 'NO IRISH, NO BLACKS, NO DOGS' (아일랜드인, 흑인, 개는 입장 금지)등의 표지판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습니다.
이런 배경이 이유가 되어 1세대였던 패트릭 케네디의 미국삶은 가난한 이민자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혹독했답습니다.
3. 이민 2세 패트릭J.케네디(존F.케네디의 할아버지):
케네디 할아버지가 케네디 가문의 운명을 바꾸기 시작합니다.
그는 이민자이기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은 항구에서 허드렛일 밖에 없었습니다.
아일랜드인들 일이 끝나면 PUB에 가 술을 마시가 그들의 안식처가 되어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는 술집(PUB)을 경영하면서 돈을 벌었고 그 힘으로 메사추세츠주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었고 주 상원위원까지 이룹습니다. 케네디라는 명문가의 기반을 닦습니다.
4. 이민 3세 조셉 P.케네디 (존 F. 케네디의 아버지):
Joseph P. Kennedy는 하버드를 나온 100만 장자의 타이틀이 있습니다.
그는 하버드 경제학과를 졸업했으며 미국의 사업가이자 정치인으로 케네디 가문의 명문가를 왕조로 바꾼데 기여했습니다.
그는 25세때 은행장으로 승진하지만 진짜 부를 축적하게 된 계기는 불법 밀주 사업이었습니다. 이후 활동 무대를 옮기는 데 월가를 가 주식으로 주가 조작을 해서 큰 이익을 남깁니다.
또 한번 돈이 되는 데 눈을 돌리며 할리우드 중소 스튜디오를 사 부피를 키워 파는 소완을 내기도 했습니다.
그의 정치적 경력은 그의 아들인 존 F. 케네디의 대통령 선거 캠페인을 지원하고 재정적으로 후원하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 RKO 영화사 할리우드의 "빅 5"라고 불리는 주요 영화 제작사 중 하나로 손꼽히며, 그들의 작품은 시대를 초월하는 영화의 고전으로 기억됩니다 영화 ' Citizen Kane '(1941년), 영화 '킹콩'(1933)을 배급했습니다. RKO는 1950년대 후반부터 경제적인 어려움과 경영상의 문제로 곤경에 처하게 되었고, 1980년대에는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영화는 영화사에 대한 영원한 기억과 공헌을 남겼습니다.
케네디 대통령의 아버지는 밀주와 주가 조작으로 엄청난 재산을 축적했지만 아무리 재산이 많아도 여전히 무시를 당해 가문의 '권력'을 쌓는데 중점을 둡니다.
1934년 미국 증권 거래위원회 초대 회장과 주영국 미국 대사가 되면서 유명인사들과의 인맥 만들고 돈많은 사업가를 넘어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는 명문가로서 미국의 사회적 상류층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1914년 아일랜드 출심 권력가 집안 딸 로즈 피츠제럴드와 결혼을 하며 케네디가의 전설인 자녀들을 낳습니다. 케네디 가문에서는 정치계에 장관,상.하원 의원, 대사 등 꾸준히 배출함으로써 존 F.케네디가 대통령가 될 수 있도록 든든한 지원군이 됐습니다.
5. 맺는 말:
170년동안 최고의 완벽한 케네디 가문이지만 존 F.케네디를 포함한 4남 5녀는 온갖 스캔들, 의혹 그리고 비극 등으로 안타까운 스토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미국인들의 절대적인 지지와 사랑을 받고 있어 그들의 명성은 마침표가 아닌 진행형입니다.
미국 곳곳에는 케네디의 이름을 따서 지은 건물이 약 400개나 있습니다. 미국 고급 공무원이 다 가는 공연장 '케네디 센터',원래는 뉴욕공항이었지만 존 F. 케네디가 암살 당한 후 'JFK 국제공항'으로 명칭이 변경된 예, 하버드 전문 대학원 '하버드 케네디 스쿨', ' 존 F. 케네디 연방건물', '케네디 도서관', '케네디 우주센터', 'JFK 의료센터' 등 일일이 열거가 힘들 정도입니다. 미국인에게 존 F.케네디의 인기와 존경이 어느정도인지 실감하게 하는 대목이죠.
"국가가 나를 위해서 무엇을 해 줄것을 바라기에 앞서, 내가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그의 명언과 같이 그는 적극적이고 결단력 있으면서도 혁신적인 접근으로 미국을 이끌었습니다. 미국 내의 인종차별 문제와 빈곤 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한 프로그램과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도 했습니다.
2012년 뜨끔없이 테일러 스위프트(Taylor Swift) 와 코너 케네디 (Conor Kennedy)의 열애가 보도 되기도 했습니다.
오늘은 '케네디 가문'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이민자로 또 근로자로 , 학생으로 각자의 동기로 외국에서 살아가는 모든 분들이 케네디의 가문을 떠올리며 조금이나마 힘이 되시길 바랍니다.
2024.02.03 - [미국 문화] - 미국인이 달고 사는 스몰토크(Small talk),영상有